〈봄〉 시 / 박후기_꽃기침, 신달자_그윽한 빛, 최형심_봄은 스캔들이다, 조정인_목련 그늘 아래서는, 정일근_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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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기침 박후기 꽃이 필 때 목련은 몸살을 앓는다 기침할 때마다 가지 끝 입 부르튼 꽃봉오리 팍팍, 터진다 처음 당신을 만졌을 때 당신 살갗에 돋던 소름을 나는 기억한다 징그럽게 눈뜨던 소름은 꽃이 되고 잎이 되고 다시 그늘이 되어 내 끓는 청춘의 이마를 짚어주곤 했다 떨림이 없었다면 꽃은 피지 못했을 것이다 떨림이 없었다면 사랑은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떨림이 마음을 흔들지 못할 때, 한시절 서로 끌어안고 살던 꽃잎들 시든 사랑 앞에서 피고 지는 꽃들이 몸살을 앓는 봄밤, 목련의 등에 살며시 귀를 대면 기침소리가 들려온다
그윽한 빛 신달자 그윽하다 저 유려한 빛깔 목련꽃 흐드러지게 핀 그 꽃잎을 가까이 바라보면 눈멀 것 같아 저런 종이를 본 적 없어 꽃잎으로 태어나 세상의 신비한 비의와 세상의 아름다움을 압축하여 시인들이여 쓰라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예지의 빛 한 줄기 가까이 갈 수가 없어 춘설로 내리는 눈송이 하나
눈 딱 감고 녹아든다 나도 저런 종이에 내 생의 시 한 줄 녹여 묻어두고 싶다 저 목련빛 저 목련 꽃빛 시인들이 무엇을 쓸지 몰라 다시 이 봄 목련 핀다.
봄은 스캔들이다 최형심 목련, 바람이 났다 알리바이를 목련흥신소 사내가 분주하다 흰 복대로 동여맨 두툼한 허리가 어딘지 수상하다 하루가 다르게 치마폭이 부풀어 오른다 여기저기 나뭇잎들이 쑥덕쑥덕거린다 하룻밤 사이에 소문이 온 개봉동에 다 퍼졌다 소문에 시달리던 목련, 나는 아무 죄가 없다고 몸을 활짝 열어젖힌다 봄이 뜨겁다
목련 그늘 아래서는 조정인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가만가만 발소리를 죽인다 마른 가지 어디에 물새알 같은 꽃봉오리를 품었었나 톡 톡 껍질을 깨고 꽃봉오리들이 흰 부리를 내놓는다 톡톡, 하늘을 두드린다 가지마다 포롱포롱 꽃들이 하얗게 날아오른다 목련 아래를 지날 때는 목련꽃 날아갈까 봐 발소리를 죽인다
저녁 정일근 아침에 반가사유하던 저 목련, 저녁에 꽃문을 연다 봄날 햇살은 고양이 목덜미 털처럼 따뜻했고 바람은 고양이 목을 쓰다듬는 착한 손길처럼 부드러웠다 나는 한낮에 나무 그늘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가는 저녁에는 꽃 그늘에서 빛나는 시집을 읽는다 스스로 꽃문을 열어 빛나는 나무의 연꽃들 그 빛에 젖어 함께 부활하는 행간의 아름다운 침묵을 무당벌레 한 마리가 제 꽃등에 지고 돌아온다 세상의 어느 손과 어떤 주술이 꽃문을 열 수 있으랴 꽃의 닫힌 문을 연 봄날 하루는 위대하였으니 하루가 경건한 느낌표로 남아 묵상하는 이 저녁 땅에는 목련꽃이 하늘에는 별이 불을 밝힐 것이다 머지않아 밤 휘파람새가 우듬지로 날아와 노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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